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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3 과거회상

Egomon 2026. 3. 23. 04:01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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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시절의 상처>
어린시절 누구나 철없는 실수도 하고
이런저런 사고를 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가해자가 되기도하고
또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기도한다.

어린시절의 잘못과 실수는
누구나 어린시절에 한번씩은 겪는 문제이지만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의 과거를 그저 합리화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피해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어린시절 피해사실이 성인기까지 영향을 미치지만 않는다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수준일 것이다.

결국 나 또한 어린시절 미숙했기에
누군가의 눈엔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을 했을 것이고
사회의 질서와는 달리 또래 집단만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이
당시 그들에게서 이상하게 비춰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닐테니까.

누군가의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모습들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인상을 줬을것이고
외모와 신체가 매력적인 누군가는
별다른 노력없이도 뭘 하든 긍정적인 인상만이 더해지듯이

결국 어린시절의 미숙함은 개개인의 잘못으로 생기는 것이 아닌
그저 그 순간만의 독특한 문화에 의한 현상에 불과했을뿐이다.

누군가는 가정에서 생긴 문제로 더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변했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가정에서 생긴 문제를 사회에서 공격적인 방향으로 풀려고 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학교라는 사회에서
청소년기 아동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를 때때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을 것이고,
다른 집단에서는 교우관계를 통해 건강하게 극복해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2. 나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는 나다>
필자는 어린시절 이상행동을 종종 보이고는 했었고
동시에 매우 낮은 사교성으로 인해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말도 잘 못하고
지나치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뿜어냈었다.
이상행동이라함은 어린시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종이를 360도 돌려가며 조금씩 찢는다던가
종이를 조금씩 뜯어서 먹는다던가
땅만 보고 걷는다던가
다양한 방어기제를 보인다던가
이 외에도 다양한 기행들을 보였었지만
점차 그런 행동들도 자각 및 타인의 조언을 통해
지각하고 고쳐나가는 계기가 되었었다.

이런 사례들에 비하면 전혀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고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훨씬 많겠지만
어찌되었든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 시절
그런 경험을 겪었던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신을 탓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어린시절의 실수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필자처럼 못나서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잘났기에 누군가의 시샘을 받은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겪은 그 시절의 경험이
자신의 잘못으로인해 경험한 것은 아니었을지몰라도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해야만
그 다음의 성장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자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타인을 공격하기도하지만
이러한 공격은 도리어 나중에 자신의 평판으로 꾸준히 쌓여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고,
타인의 괴롭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것 역시
세월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신을 비슷한 위험 속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

즉 타인의 잘못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몫이며
자신을 보호하고, 회복하는 것은 억울하더라도
결국 개인의 역량으로 해결해나가야한다는 것.

누군가는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어떤 시련이든 잘 극복하기도 하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주변에 아무리 좋은 친구들이 많아도
자기보호적 행위로 타인을 해치는 사람도 있고,
피해 사실에만 갇혀 회복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알아서 치유되길 바라는 사람도 존재한다.

길가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면
그 무릎을 씻어 감염을 예방하고
안정적인 회복을 위해 밴드를 붙이는 것은
개인의 몫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릴땐 부모님이 밴드도 붙여주고 위로도 해주겠지만
그것은 정말 어린시절에만 가능한 것이며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상처는 운이 나쁘면 곪거나 썩을 수도 있다
결국 그러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마치 어린시절 투라우마를 정신과 치료를 통해
극복해나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매우 흡사한 형태이다.


<3. 눈치밥>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여태 말했던 경험들이 없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의미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항상 타인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며,
타인들에게 맞추며 살아간다는 것
대부분은 가정환경에 의해
부모의 비일관적인 양육으로 인하여
부모에게 원하는 반응을 얻기 위해
아주 어릴때부터 부모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아동의 경우
양육자로부터의 애정을 얻기 위하여
눈치가 발달해오며 자연스레 타인의 기분에 맞추는 것이
학습되어왔을 수도 있고,

특정 행동들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결국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직결된다는 것을 학습하며
애정 충족을 위한 이유로 타인의 기분에 맞추는 것을 학습해왔을 수도 있고,

그저 부모님과 주변 지인들이 타인의 기분을 살피고, 배려하는 모습들을 보며 간접 학습이 되는 등의 이유로
대부분 사랑받기 위해,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우리는 눈치를 학습하게 되고
결국 타인들의 평가에 민감해지는 성향으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데

결국 이러한 것이 청소년기에 매우 강하게 작용하여
누군가는 주도적이게, 누군가는 타인에게 무조건 맞춰주도록 발달되며 여지껏 설명했던 현상들에 기여하게된다.

결국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소속되기 위해,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때로는 버려가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렇게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왜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쓸까?
타인들의 평가에 그렇게 민감해지는 것일까?

물론 심리학에서 말하듯 자신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가 아닌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맞추는 것이 그 원인이고
이는 나아가 타인들로부터 배척 당하지 않기 위해
특정 집단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가며 살아가려는 일종의 생존본능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소속되기 위해,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버려가면서라도 특정한 기준에 맞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알더라도
그것은 특정 집단이나 사회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다르게 비춰질 수 있다.
가령 가부장적인 남성이 과거엔 남성적인 특징이었다고한다면
현재는 가정적인 남성이 훨씬 선호되듯이
사회가 변함에 따라서
좋은 것은 때로는 나쁜 것처럼 비춰지고
나쁜 것은 때로는 좋게 비춰지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 객관적으로 본인에게 문제가 없더라도
사회나 특정 집단의 문화나 인식에 따라
얼마든지 나쁘게 비춰질 수 있다는 것.

즉 우리가 눈치를 보는 이유는
객관적인 사실과 실제 사회나 집단에서 요구되는 모습이 상반되고 때로는 모순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의 균형을 찾기 위해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어떤 규칙이나 규율을 설명할때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그게 맞으니까”라는 모호한 답변을 내놓기도 하는데
결국 특정 질서를 위해 과도하게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이나 규율이 왜 필요한지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하며
득만이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고
실이 전혀 없기 때문도 아니기에
이해하기도 까다롭고, 설명하기도 다소 어려워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따를 뿐인 것이다.

소속되기 위해,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미움 받지 않기 위해
그렇게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다.

연인끼리는 상대를 잃지 않기 위해,
가족끼리는 상처주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그렇게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다.


<4. 진정한 나로 살아간다는 것>
이런 불편함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하냐고 묻는다면
단언코 아니라고 말하고싶다.

그 어느 종교의 서적을 접하더라도,
어떤 철학을 접하더라도,
어떤 심리학을 공부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되어 살아가는 것
다시말해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상대방에게 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먼저 나를 이해해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불쾌한 감정이 올라오고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렇다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될까?
내 기준에 맞춰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행동하라고 말한다면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될까?
타인에게 맞추는 성향의 사람들은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실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떨까?
나는 잘못하지만 상대방은 잘못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스스로를 부족하다는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주로 보이는 논리인데
나와 남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내가 실수하는 분야에서는 타인의 실수를 이해하게 된다.

한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2살부터 언어를 구사하는 아이가 있다면
3살이 돼서야 언어를 구사하는 아이를 볼때
지능이 낮은 아이로 보거나, 이해 자체를 못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은 누구나가 자신이 쉽게 한 일에 대해서
그저 본인이 쉽게 해냈을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채
자신만큼 하지 못하는 타인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모든 것은 경험에서 우러나는 것이고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만큼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보면
타인의 행동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고
화가나는 이유는 뭘까?
바로 타인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경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의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나의 삶만을 기준으로 타인이 옳거나, 틀리거나, 부족하거나, 유능하게 보인다는 얘기다.

즉 경험의 폭이 넓은 만큼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만큼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그런 대우를 받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타인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다소 건강한 자기개념을 가지기도하고
타인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타인과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란것을 지각한다면
타인의 잘못도 자신의 잘못만큼 이해하겠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높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나는 못해도, 너는 할줄 알아야한다는 당위성을 전가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패턴은 매우 복잡하면서도
매우 단순한 결론을 보여준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만큼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를 알고, 남을 아는 것이
곧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즉 진정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 자신의 실수와, 피해 모두를 받아들이고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

나의 행동에 책임질 줄도 알고
나를 향한 부당함에 대항할 줄도 아는 삶이 아닐까?